전복의 7,500년 역사
![[기복이네 벌떡전복] 완도 활전복 1kg 대 7~8미](/_next/image?url=%2Fimages%2Fproduct-original%2Flive-glove-one-v2.webp&w=1600&q=75)
7,500년 전, 빗창
전복을 언제부터 먹었냐고 물으면 대답이 조금 이상해져요.
기록이 아니라 유물부터 나오기 때문이에요.
부산 동삼동 패총은 기원전 5,500년부터 기원전 2,000년까지, 약 3,500년에 걸쳐 쌓인 신석기 유적이에요.
여기서 전복과 소라 껍데기가 나왔어요.
둘 다 잠수하지 않으면 딸 수 없는 것들이에요.
그리고 같이 나온 것이 하나 더 있어요.
빗창. 바위에 붙은 전복을 떼어내는 전용 도구예요.
이게 왜 중요하냐면 — 우연히 주워 먹은 게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에요.
전복을 따려고 도구를 만들었고, 그 도구를 들고 물에 들어갔어요.
한반도의 전복 채취 기술은 문자보다, 국가보다, 농사보다 먼저 있었어요.
더 신기한 건 그 도구가 지금도 쓰인다는 거예요.
오늘날 해녀가 손에 쥐는 빗창이 그 빗창과 기능이 같아요.
7,500년째 같은 도구로 같은 것을 따요.
껍데기로 만든 화살촉
제주 김녕리 궤내기 동굴 유적에서는 전복 껍데기를 갈아 만든 화살촉이 나왔어요.
초기 철기시대 유물이고, 지금까지 제주에서만 확인된 형식이에요.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에요.
전복 껍데기는 돌보다 다루기 까다롭고 잘 부러져요.
화살촉으로 쓰기엔 돌이 훨씬 나아요.
그런데도 굳이 전복으로 만들었어요.
게다가 이 화살촉은 자루를 끼우는 부분이 없는 형태라, 실제로 쏘는 무기가 아니라 의례용으로 추정돼요.
사냥하려고 만든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즉 기능이 아니라 상징 때문에 전복을 골랐어요.
2천 년 전 제주에서 전복은 이미 그냥 먹을 것이 아니었어요.
고려 — 껍데기가 국보가 되다
전복 껍데기 안쪽에는 진주층이 겹겹이 쌓여 있어요.
여기에 빛이 들어가 간섭을 일으키면 무지갯빛이 나요.
이걸 얇게 갈아 문양대로 잘라 붙인 것이 자개이고, 옻칠과 함께 쓴 것이 나전칠기예요.
| 자개 이름 | 재료 | 특징 |
|---|---|---|
| 청패(靑貝) | 전복 껍데기 | 청록빛이 도는 복잡한 색. 그중 가장 좋은 것을 색패(色貝)라 해서 최상품으로 쳤어요 |
| 야광패(夜光貝) | 소라 껍데기 | 빛이 강해 어두운 곳에서도 보석처럼 빛나요 |
| 진주패 | 진주조개 | 밝은 무지갯빛. 원패가 크고 두꺼워 입체적인 조각이 가능해요 |
예로부터 남해에서 딴 색패를 최상으로 쳤어요.
고려는 이걸 개인 공예로 두지 않고 국가가 관리했어요.
『고려사』에 따르면 국영 공방에 자개를 다루는 나전장, 옻칠을 하는 칠장, 나무 기물을 짜는 소목장이 각각 따로 있었어요.
13세기 후반에는 불경 보관함 제작만 맡는 국영기관 전함조성도감(鈿函造成都監)까지 두었어요.
고려 나전칠기는 지금 세계에 남은 것이 극소수이고, 대부분 해외 박물관에 있어요.
국립중앙박물관의 「나전 칠 모란넝쿨무늬 경전함」이 대표작이에요.


살은 임금의 상에 오르고, 껍데기는 천 년 가는 물건이 됐어요.
버릴 데가 없었어요.
조선 — 실패가 허용되지 않던 물건
조선에서 전복은 공물이었어요.
조개류 공물 12종 가운데 전복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어요.
생것(생복), 말린 것(건복), 삶은 것(숙복)으로 나눠 올렸고, 내장을 소금에 절인 젓갈은 중국 사신에게 주는 선물로 썼어요.
실록에 이런 기록들이 남아 있어요.
| 기록 | 내용 |
|---|---|
| 1478 | 명나라 황제가 조선 전복을 직접 요구했다 (『성종실록』) |
| 1482 | 조정이 전복 공물로 인한 백성의 어려움을 인지했다 (『성종실록』) |
| 1518 | 큰 전복 수량이 모자란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중종실록』) |
| 1768 | 올려보낸 전복이 상해서 통제사가 국문을 당했다 (『영조실록』) |
마지막 기록에서 잠깐 멈추게 돼요.
전복이 상했다는 이유로 지휘관이 심문을 받았어요.
그만큼 실패가 허용되지 않는 물건이었다는 뜻이고, 그 압력은 그대로 아래로 내려갔어요.
제주에서 깊은 물에 들어가 전복을 따던 남자 잠수부를 포작인(鮑作人)이라 불렀어요.
이들은 잠수 채취에 더해 수군 복무와 노 젓는 일까지 겸했어요.
할당량은 계속 늘었고, 관리들이 중간에 빼돌리는 양이 진상량의 몇 배에 달했어요.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섬을 떠나기 시작했어요.
조정은 제도를 고치는 대신 포구를 막았어요.
나중에는 배 만드는 것까지 금지했어요.
그리고 결국 포작의 일을 여성 해녀에게 넘겼어요.
그래서 포작인이라는 직업이 사라지고 제주에 해녀만 남았어요.
오늘날 우리가 아는 제주 해녀의 모습은 그 결과예요.
전해지는 이야기로, 정조는 해녀들의 사정을 듣고 그토록 좋아하던 전복을 끊었다고 해요.
완도와 전복이 같은 페이지에 있던 때
완도는 조선시대 내내 독립된 고을이 아니었어요.
1449년(세종 31)부터 강진현에 딸린 섬이었고, 완도군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은 1896년이에요.
그런데 1454년에 나온 『세종실록』 지리지 강진현 조를 펼치면 두 가지가 같이 적혀 있어요.
| 항목 | 기록 |
|---|---|
| 토공(공물) | 여우가죽 · 삵괭이가죽 · 족제비털 · 지초 · 작설차 · 전복 · 상곽 · 표고 · 석이 · 비자 · 칠 |
| 해도(딸린 섬) | 완도 · 조약도 · 선산도 · 고이도 — 넷뿐이에요 |
같은 장에, 공물로 전복이 있고, 섬으로 완도가 있어요.
출처: 『세종실록』 권151 지리지 / 전라도 / 나주목 / 강진현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그리고 1990년
여기까지가 7,000년이에요.
그동안 전복은 한 번도 흔한 음식이었던 적이 없어요.
따는 것이었지 기르는 것이 아니었고, 바치는 것이었지 사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게 바뀐 게 1990년이에요.
완도 미라리에서 주민 서른 명 남짓이 치패를 사다가 마을 앞바다에 넣었어요.
어민이 직접 한 전국 첫 상업 양식이었어요.
그해 전국에서 나온 양식 전복이 2톤이었어요.
2025년엔 전국 27,177톤, 그중 완도에서 20,166톤이 나왔어요.

7천 년 동안 임금만 먹던 것을, 완도 어민들이 처음으로 모두의 식탁에 올렸어요.
저희도 그 안에 있어요.
한눈에 보는 연표
| 시기 | 일 |
|---|---|
| 기원전 5,500년 | 부산 동삼동 패총 — 전복과 함께 빗창 출토 |
| 초기 철기 | 제주 김녕리 궤내기 동굴 — 전복 껍데기 화살촉 |
| 1105년 | 고려, 잠수 채취에 관한 최초의 문헌 기록 |
| 13세기 후반 | 고려, 나전 전담 국영기관 전함조성도감 설치 |
| 1454년 | 『세종실록』 지리지 — 강진현 공물에 전복, 강진의 섬에 완도 |
| 1768년 | 올려보낸 전복이 상해 통제사가 국문당함 |
| 1814년 | 정약전 『자산어보』에 전복을 '복어(鰒魚)'로 기록 |
| 1981년 | 완도군, 국내 최초로 전복 양식 성공 |
| 1990년 | 완도 미라리 어민 30여 명이 상업 양식 시작 — 그해 전국 2톤 |
| 2025년 | 전국 27,177톤, 그중 완도 20,166톤 |
완도가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었는지는 완도가 전복 주산지가 된 이유에서 이어져요.
지금 파는 전복을 고르는 기준이 궁금하시면 1kg은 몇 마리인가요부터 보시면 돼요.
이 기준으로 고르기
자주 묻는 질문
전복이 원래 그렇게 귀한 거였나요?▾
네.
조선시대 조개류 공물 12종 가운데 전복이 가장 큰 비중이었고, 명나라 황제가 조선 전복을 직접 요구한 기록도 있어요(『성종실록』 1478).
1768년에는 올려보낸 전복이 상했다는 이유로 통제사가 국문을 당했어요.
실패가 허용되지 않는 물건이었어요.
전복 껍데기로 자개를 만든다는 게 사실인가요?▾
사실이에요.
나전칠기의 자개 재료 중 전복 껍데기로 만든 것을 청패(靑貝)라 하고, 그중 색이 가장 좋은 것을 색패(色貝)라고 해서 최상품으로 쳤어요.
고려는 나전 제작을 국가가 관리해 13세기 후반에는 전담 기관인 전함조성도감까지 두었어요.
완도 전복도 조선시대에 진상했나요?▾
『세종실록』 지리지(1454) 강진현 조에 완도가 강진의 섬으로 적혀 있고, 같은 장의 공물 목록에 전복이 있어요.
완도가 독립 행정구역이 된 것은 1896년이에요.


